트럼프·머스크엔 눈엣가시 ‘USAID’, 한국엔 경제 기적 이끈 ‘선한 영향력’ [★★글로벌]

1961년 태동한 美 국제개발처
폐허된 韓 재건에 마중물 역할
해외인재 유턴 이끈 KIST부터
학자 교류 ‘미네소타 프로젝트’
과학인재 ‘요람’ 카이스트까지
‘불 꺼지지 않는’ 경쟁력의 토대

연일 폭주하는 트럼프발 관세전쟁 뉴스 속으로 한국 경제의 성공 스토리에서 작지만 아련하게 각인된 한 단어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바로 ‘USAID’ 입니다.


한국어로 ‘미 국제개발처’인 이 조직은 힘없고 못 사는 나라들을 돕는 미국의 원조 채널들을 하나로 흡수 통합해 케네디 행정부가 1961년 출범시킨 독립부처입니다.

냉전 시대 소련과 패권 경쟁에서 극빈국에 이타주의 영향력을 행사해 세력 확대를 꾀하는 게 USAID의 밑그림입니다.


그런데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측근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한 해 수 십조원의 예산을 쓰며 타국을 돕는 사치를 부리는 조직은 필요가 없다며 1호 청산 부처로 지목한 것이죠.
정부 조직에 대한 신설과 해체 권한을 가진 대통령의 결정을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USAID는 미국이 슈퍼파워로 성장한 스토리에서 미국의 자격을 긍정적으로 구술하는 키워드였습니다.

특히 64년 만에 폐지 위기에 몰린 USAID가 한국 경제 재건에 상당한 기여를 했기에 몇 줄의 기사로 그 호혜적 행보를 기록합니다.


■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시대를 열다
1969년 항공사진을 통해 바라보는 서울 홍릉 KIST 전경. <출처=KIST>
지난 1966년 태동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별명은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입니다.

해방과 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물적 인프라와 함께 ‘사람’이 다시 서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당시 미국과 공동 사업으로 KIST가 발족할 수 있었죠.
KIST 설립을 지원한 창구가 바로 USAID입니다.

KIST가 설립돼 한국 경제의 성장 기적을 일군 브레인으로 활약상을 지켜보며 USAID는 “해외에 유출된 고급 두뇌들을 유치해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촉발한 세계적 혁신 사례”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KIST가 혁신 연구의 거점 역할을 하면서 기업들은 반도체·자동차·조선·철강·통신 등 고부가가치 산업에 도전할 수 있었고, 우리 경제는 세계가 경악할 속도로 성장과 혁신의 결실을 거뒀습니다.


경제 성장과 과학기술 혁신의 심장부 역할을 한 KIST에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성공을 위해 불철주야 달려온 한국 경제의 여정을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 출발점에 USAID가 있었던 것이죠.

■ ‘전신망 재건’에 100만 달러 차관
1959년 정부가 목표로 한 전신전화 설치 회선 전망 개요도. <출처=국가기록원>
한국을 디지털 강국으로 만든 기반이 된 통신 산업에도 미국 USAID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시내 전화시설 확장에 100만 달러, 연리 2%·7년 거치 13년 상환’이라는 조건으로 USAID가 한국에 제공한 차관 등이 오늘날 한국을 세계적 IT 강국으로 끌어올린 통신 산업의 기틀을 세우는 마중물이 된 것이죠.
전후 통신망 재건 과정에서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한국 통신 산업의 성장 시점도 크게 지연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당시 USAID의 차관은 미국의 원조 방식에서 중요한 변화가 이는 가운데 이뤄졌습니다.


미국은 보다 효과적인 해외 원조를 위해 무상 자금 지원 방식을 차관 방식으로 바꾸고 소프트파워에 해당하는 사람과 기술 지원에도 힘을 쓰게 됩니다.


여기에 중후장대 산업을 일으키려는 정부 계획 경제 시스템이 맞물려 한국 경제라는 엔진을 돌리는 저렴한 연료로 USAID 차관이 활용된 것입니다.


■ 과학인재의 요람 ‘KAIST’에 등장하는 USAID
KAIST가 기관 태동의 주역 중 한 명인 미국 존 해너 신임 USAID 처장이 1969년 개발도상국 원조 방식에 대해 “물고기를 주지 말고 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라”라고 언급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출처=KAIST>

대한민국 과학인재의 요람인 KAIST(한국과학기술원)의 설립 비화에서도 USAID라는 이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정근모 박사가 1969년 한국에 국제 수준의 과학기술대학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USAID에 제안했고, 600만달러에 이르는 USAID의 차관으로 현 KAIST가 태동했습니다.


당시 정근모 박사가 설립 제안 보고서를 쓴 배경이 흥미롭습니다.

미시간주립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 그는 1969년 자신의 스승인 존 해너 미시간주립대 총장이 USAID 처장에 취임했다는 기사를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당 기사에서 해너 처장은 “개발도상국에 물고기를 주는 대신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치겠다”고 언급했고, 이 방향성에 감탄한 정 박사는 과거 자신이 쓴 ‘후진국에서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란 논문을 들고 해너 처장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해당 논문을 읽은 해너 처장이 호응하고 한국에 연구개발 특화 대학을 만드는 제안서를 정 박사와 미국 스탠포드대 부총장을 지낸 프레데릭 터먼에게 만들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들이 공동 작성한 보고서가 1970년 12월 마침내 해너 처장 책상 앞에 제출됐습니다.

‘터먼보고서’로 명명된 이 제안서가 1971년 KAIST 개교의 근간이 된 것이죠.
55년 전 작성된 이 제안서는 마지막 장(미래의 꿈)에서 “2000년대 KAIST가 국제적 명성의 훌륭한 과학기술대학으로 성장해 한국 교육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봉(spearheaded)에 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이 포부는 현실이 됐습니다.


■ 의료강국 밑거름 된 ‘미네소타 프로젝트’
1954년 미네소타대와 서울대 간 첫 교류 협정이 체결될 당시 사진. <출처=서울대학교>
미국은 유수 대학에서 한국인이 최고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도왔는데 이 과정에서도 USAID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구체적으로 미국에 한국의 학자들을 보내 양성하는 ‘미네소타 프로젝트’가 가동됐는데 이 창구도 USAID였습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초기 서울대 의대, 공대, 농대 등 3개 단과대학에서 출발해 이후 행정대학원, 간호학과, 수의대 등으로 확대됐습니다.


미국 미네소타대 홈페이지에 소개된 이 프로젝트 내용을 보면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서울대 재건과 현대화를 위한 미국 협력 대학으로 미네소타대를 선정했습니다.


양 대학에 공동으로 본부를 두고 한국인 학자들을 미네소타대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미네소타대는 이 축적된 교류의 성과에 대해 “과거 우리로부터 혜택을 받은 서울대는 이제 라오스국립대를 상대로 미네소타 프로젝트와 유사한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라며 수혜 대상에서 공여자로 변신한 서울대의 역할을 조명하기도 했습니다.


민기복 서울대 에너지자원공학과 교수는 지난 2021년 쓴 교수 칼럼 ‘미네소타 프로젝트(1954-1962)를 생각한다’에서 “필자가 속한 에너지자원공학과에서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대한 보답으로 최근 ‘에너지자원국제인력양성 장학금’을 조성하여 한국보다 훨씬 어려운 여건에 있는 나라들의 학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며 “어려울 때 받은 도움에 대하여 잊지 않고 이를 되갚는 것은 인지상정으로 서울대가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통해 받은 도움을 이제는 되갚아야 할 때”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민 교수는 “에너지자원공학과의 조그만 노력이 씨앗이 되어 보다 대규모의 저개발국가 과학기술분야 교육원조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 트럼프 시대 종언 고하는 ‘선한 영향력’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과 혁신 과정에서 돌출되는 USAID라는 이름은 몇 개의 사례만으로도 각별하고 소중합니다.


그런데 이 조직이 60여년 만에 존폐 위기에 몰렸다는 것은 그만큼 각자도생와 제로섬 게임으로 재편되는 트럼프발 국내외 질서 재편 속도가 가파르고 무차별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약하게도 미국의 동맹으로써 수혜를 입은 개발도상국 중 최고의 경제성공 신화를 쓴 한국은 트럼프 집권기마다 미국을 착취한 악덕 국가로 서사 구조가 180도 달라집니다.


트럼프라는 리더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트럼프 집권을 한국 시민들이 엄중하게 인식해야 하는 이유도 상호 호혜의 결실을 악마화하고 공격의 빌미로 삼는 그의 프레임 전환 능력 때문입니다.


예상대로 2기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라는 동맹의 디폴트 값을 ‘머니머신’이라는 저렴한 표현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세계를 호령하는 슈퍼파워에 오르는 과정에서 강력한 경제·군사력의 축적과 더불어 다른 나라들의 존중을 끌어내는 이타적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USAID를 와해시킨다면 미국이 행사한 이 소프트파워는 할리우드 영화나 고(故)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자서전에서나 만날 옛 얘기가 될 것입니다.


2014년 2월 미국 항공우주국국(NASA)이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찍어 공개한 한반도 야간 사진. 전력 부족으로 해안선조차 구분되지 않은 북한과 환하게 빛나는 한국의 상황을 보여주는 이 한 장의 사진은 냉전 시대 미국의 개발도상국 지원이 어떤 효과를 거뒀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처=NASA 및 월스트리트저널 영상 캡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