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석학 레비츠키·지블랫 교수
공화당 대권 잠룡들 태도에서
당면한 美 민주주의 위기 포착
제도 훼손 방관 ‘기회주의’ 정치
민주주의 붕괴 완성하는 공범
계엄 후 한국 보수정치의 대응
불법 무관용 브라질만도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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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미국 공화당 대선 예비경선 토론회에서 경쟁자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그를 지지할 것인가. 그렇다면 손을 들어달라”는 사회자 질문에 주저 없이 혹은 주변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손을 드는 경선 후보자들 모습. 당시 토론회 청중석은 트럼프 전 대통령 추종자들의 환호가 가득했고 진보 매체들은 대선을 불복한 트럼프의 범죄 혐의를 묵인하며 지지의 뜻으로 손을 든 공화당 정치인들의 모습이 위험에 처한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보여준다고 조명했다. <이미지=폭스뉴스 영상 캡처> |
민주주의의 암살자들은 항상 공범을 데리고 있다. 이 공범들은 권력의 전당에 있는 평범한 정치인들이다.
지지층의 분노를 피하려는 정치인들의 비겁함은 민주주의에서 사소한 묵인을 넘어선다.
트럼프와 같은 선동가, 극단적 추종자들로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이 붕괴에 필수적으로 참여하는 공범이 바로 이 같은 평범한 정치인들이다.
지난 2023년 9월 8일 스티븐 레비츠키와 다니엘 지블랫이라는 정치학자가 뉴욕타임스(NYT)에 이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립니다.
기고문의 제목은
‘민주주의 암살자들에게는 항상 공범이 함께한다’입니다.
두 학자의 이름이 익숙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들이죠.
두 교수가 이 칼럼을 쓴 이유는 평범한 정치인들이 저지르는 ‘사소한 묵인’에 대해 미리 경고하기 위함입니다.
2023년 8월 미국 공화당 대선 예비경선 토론회 장면에서 받은 충격 때문입니다.
당시 토론회에서 트럼프의 경쟁자들은 사회자로부터 “트럼프 전 대통령이 향후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당이 그를 선택한다면 지지할 것인가. 그렇다면 손을 들어달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이 토론회에는 유력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불참한 가운데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사업가 출신 비벡 라마스와미,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 팀 스콧 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 더그 버검 노스다코타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 아사 허친슨 전 아칸소 주지사 등 8명이 참가했습니다.
현장 방청석에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목소리가 뜨거웠고 사회자 질문에 비벡 라마스와미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습니다.
니키 헤일리 전 대사도 주저가 없었습니다.
드샌티스 주지사는 다른 네 명의 후보가 손을 든 후에 좌우를 바라보고 손을 들었고, 트럼프 1기 러닝메이트였던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은 마지못한 듯 손을 들었습니다.
아사 허친슨 전 아칸소 주지사만 유일하게 손들기를 거부했습니다.
이 몇 초의 장면에서 하버드대 두 정치 석학은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신호를 포착한 것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20년 대선 결과에 불복해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선거 결과를 전복하려 했습니다.
이는 잠재적인 중대 범죄일 뿐만 아니라, 선거의 기본 원칙을 위반한 행위입니다.
승패에 관계없이 선거 결과를 깨끗하게 받아들이는 게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기본 규칙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인들이 이런 기본 인식을 하지 못하고 단 한 명만 빼고 모두 손을 든 것이죠.
이에 NYT에 ‘민주주의 암살에는 항상 공범이 있다’는 기고를 올리고 유권자 눈치를 보는 이런 정치적 비겁함이 사소한 묵인을 넘어, 민주주의 붕괴를 가져오는 마침표 역할을 한다고 경고한 것이죠.
특히 두 학자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많은 주류 정치인들이 체제 전복에 헌신하는 권위주의자가 아니라 단순히 출세를 노리는 ‘커리어리스트’라는 점을 독자들에게 환기시킵니다.
커리어주의는 정치의 정상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때 이런 기회주의적 태도가 민주주의 수호보다 정치적 야망 쪽으로 흐를 수 있고, 이로 인해 민주주의가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이죠.
지난 12월 3일. 한국의 비상 계엄 사태와 집권 여당의 태도를 대입해보면 이 기고문은 소름 끼치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한국의 평범한 정치인들도 하버드대 교수들이 경고하는 위험한 ‘커리어리스트’이자 ‘공범’의 범주에 들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 보수 정치 수준은 브라질만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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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브라질 대선에서 우파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좌파 후보 룰라에게 석패하자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2023년 1월 8일 보우소나루 대통령 지지자들이 대법원 청사를 공격하며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지=BBC 영상 캡처> |
두 석학은 2023년 1월 8일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대통령 선거 결과를 부정하며 의회와 대통령 집무실, 대법원 청사를 습격했을 때 브라질의 보수 정치인들은 폭력 행위를 강력히 규탄했음을 환기시킵니다.
심지어 브라질의 보수 정치인들은 이 반란 사태에 대한 의회 조사를 촉구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무엇보다 브라질 정치인 가운데 법원의 정당성에 되레 공격을 가하거나 보우소나루를 정치적 박해의 희생자로 옹호하는 자들은 없었다고 하버드대 두 학자는 강조합니다.
스티븐 레비츠키·다니엘 지블랫 교수는 기고문에서 브라질 사례가 미국 정치인들보다 낫다고 비교했지만 작금의 한국의 정치 상황에 투사하더라도 한국의 보수 정치는 브라질 우파 정치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평범한 정치인들의 무도한 무관심이 민주주의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Such reckless indifference could make them indispensable partners in democracy’s demise.)
2023년 9월 두 정치 석학이 뉴욕타임스에 기록한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경고는 한국의 위험천만한 커리어리스트 정치인들에게도 엄중한 죽비소리가 돼야 할 것입니다.
트럼프 지지에 주저 없이 혹은 마지못해 손을 들었던 미국 공화당 잠룡들 수준이나 민주주의 붕괴 위협에 ‘인간적 도리’로 얼버무리는 한국 보수정치 리더들의 수준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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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후 자리를 떠나는 여야 의원들 모습. <사진=매일경제 한주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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