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울산 미포만의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 영국의 한 은행 임원을 설득할 때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세계 최초 철갑선' 거북선을 보여줬다는 일화가 있다.

동아시아 작은 나라에서 수백 년 전에 철갑선을 만들었다는 얘기에 이 영국인은 감동했겠지만, 더 이상 현실에서 먹혀들지 않을 마법 같은 주문이다.

호주 호위함 사업에서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은 '정주영급 전설'을 재현해낼 것처럼 종이도면을 내밀었지만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호주 정부가 25일 호위함 사업(10조원 규모)에서 한국을 탈락시키고 독일과 일본 업체 2곳만 숏리스트로 발표했다.

'이번에 안 된 것은 어쩔 수 없고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고 넘어갈 상황이 아니다.

세계에서 배를 가장 잘 만드는 한국이지만, 해양 방위산업 분야에서는 당국의 뒷짐 속에 양대 조선 업체가 집안 싸움에 골몰하고 있어서다.


이들 업체가 호주에 팔려고 했던 군함은 한마디로 '원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HD현대는 울산급 배치3인 '충남급' 호위함을, 한화오션은 울산급 배치2인 '대구급' 호위함을 제안했다.

한국에서 근해 작전용으로 운용하는 함정이다.

반면 호주 해군이 원한 함정은 태평양·인도양 먼바다에서 중국 해군을 견제하기 위한 용도였다.


호주가 선택한 독일·일본 함정은 작전 가능 범위가 우리 업체 것보다 약 1.5~2배 넓다.

한국 업체들은 호주 해군이 운용하는 데 부족하지 않도록 성능을 개량해주고 설득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호주 해군이 검증된 실물과 제안서에 써진 숫자 중 어떤 것을 고를지 이미 게임은 끝난 상태였다는 게 방산 전문가들 지적이었다.

특히 정부가 'K방산'을 대표적 성과로 삼고 있는데도 후보군에조차 들지 못했다.

외교력 부재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두 업체는 한국형 구축함(KDDX) 사업 수주 경쟁에서 법적 다툼까지 벌였다.

결국 지난 22일 한화오션이 고소를 취하했고, HD현대도 25일 맞고소를 취하하면서 봉합 모양새를 보였다.

하지만 감정 대립은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사업을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방위사업청조차 조속히 정상화시키기는커녕 업체 간 갈등에 소극적인 대응뿐이다.


세계 군함 도입 사업은 수십조 원 규모다.

캐나다 순찰 잠수함 사업, 필리핀 3차 호라이즌 프로젝트, 사우디아라비아 해군 증강 사업이 예정돼 있다.

독일·프랑스·영국·일본 등은 정부와 조선사가 원팀으로 악착같이 덤벼들고 있다.

이들에게 번번이 패배한 뒤 'K해양방산' 원팀을 구성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안두원 산업부 차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늘의 이슈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