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소득층·여성·소수자 우대’ 문구 슬그머니 없앤 기업들 어디?

지난해 ‘적극적 우대조치’ 위헌 결정 이후
인종 우대 채용·승진 소송 가능성 커지자
연레보고서에서 다양성 언급 줄이거나 삭제
보수 진영 반발도 거세...“능력주의 훼손”

[사진 = AFP 연합뉴스]
흑인과 라틴계, 여성, 성소수자 등의 채용을 늘리겠다고 약속하며 ‘다양성’을 강조했던 기업들이 연례보고서에서 슬그머니 이 단어를 삭제하기 시작했다.


‘깨어있는(Woke·워크)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적 반발 심리가 커지면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마찬가지로 다양성 역시 조심스럽게 숨겨지는 모양새다.

외부 반대 세력들의 거센 저항은 물론 최악의 경우 법적 소송까지 당할 위험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지난해 연례보고서(10-K)를 분석한 결과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에 대한 내용을 줄이거나 일부 변경한 경우가 빈번했으며, 관련 내용을 아예 없애는 경우도 많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1일(현지시간) 전했다.

DEI란 다양성(Diversity), 형평성(Equity), 포용성(Inclusion)의 약자다.

DEI는 정부와 대학교는 물론 기업들이 채용과 보상에 있어서 인종과 성별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기조로 자리매김해왔다.


실제로 미국 최대 백화점 체인 콜스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연례보고서에 ‘다양한 리더’(Diverse leaders)를 발굴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지난해에는 ‘다양한’이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경쟁사 노드스트롬도 2020년부터 흑인과 라틴계가 소유·운영·디자인한 브랜드에서 5억달러(약 6899억원)의 매출을 달성하고, 관리자 직책의 50%를 이들 인종에게 할당하겠다고 연례보고서에 명시했지만 지난해 이를 없앴다.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 세일즈포스는 직원의 50%를 소외 계층 출신으로 채용하고, 특히 전체 직원의 40%를 여성 또는 논 바이너리(non-binary·한쪽 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규정하는 사람)로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지만, 최근 연례보고서에서는 이 문구를 뺐다.

대신 평등에 초점을 맞춰 디자인 등을 개선하겠다는 내용을 올렸다.


기업의 인사·재무관리를 지원하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워크데이는 2020년부터 전체 직원의 30%를 흑인과 라틴계 직원으로 채우고, 이들 인종의 리더 수를 지난해 말까지 두 배로 늘리겠다고 연례 보고서에 올렸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이 같은 내용이 보고서에서 사라졌다.


이외에도 게임스탑, 베스트바이, 유아이패스 등의 기업이 ‘인종차별적 관행 철폐’ 목표를 수정하거나 삭제했다.


채용 사이트 인디드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DEI 관련 채용 공고는 전년 동기 대비 4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현상은 미 연방대법원이 지난해 6월 대학교 입학에서 소수 인종을 우대하는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에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법적인 변수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소수 인종이나 여성을 우대하는 정책을 연례보고서에 명시할 경우 역차별 소송을 당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DEI 프로그램을 적극 확대한 기업들은 소송 리스크에 휘말리고 있다.

지난해 스타벅스는 2025년까지 총직원의 30%를 유색인종으로 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고, 이를 달성하는 임원에 대한 보상책을 검토하다가 고소당했다.

통신사 컴캐스트도 흑인·원주민·유색인종·여성이 51% 이상 지분을 가진 중소기업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다 차별금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고발됐다.


대법원 판결 이후 다양성에 대한 보수 진영의 반발 심리가 격해지고 있는 것도 기업들이 DEI 정책을 공표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WSJ은 분석했다.

일부 보수 진영은 DEI가 능력주의를 훼손하고, 백인 남성의 역차별을 초래한다며 강력히 반발해 왔다.


WSJ에 따르면 대법원 판결 이후 미국에서 공화당 소속의 주 법무부 장관들은 포천지가 선정한 100대 기업에 서한을 보내 직원 신규 채용과 승진 과정에서 인종을 고려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자 민주당 소속 주 법무부 장관들도 같은 기업들에게 서한을 보내 다양성 증진 프로그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화당 지지층이 두꺼운 유타주를 비롯해 텍사스, 노스다코타, 노스캐롤라이나 등 미국 8개 주는 최근 DEI 금지법을 제정하며 공립 교육기관과 주 공공기관에서 DEI정책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각종 공공 프로그램에서 DEI 관련 용어는 퇴출했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평가 방식을 인종차별이나 성차별로 간주하는 것도 제한했다.


기업 보고서를 연구하는 금융정보업체 모닝스타의 린제이 스튜어트 애널리스트는 “최근 기업이 기꺼이 감수하려는 정치적 위험도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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