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끝났다”…FT, 한국 저출산·고령화·낡은 경제성장 모델 통렬한 지적

반도체 클러스터 300조 투자에도
첨단 반도체 제외 中 맹추격에 고전
높은 가계부채와 자살률도 문제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전망한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내년 이후 2%대로 정체된 모습. [자료=IMF]
6·25 전쟁 이후 반세기 만에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한국을 오늘날 경제 강국으로 만든 ‘한강의 기적’이 그 수명을 다했다는 뼈아픈 지적이 나왔다.


22일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날 아시아판 지면을 통해 ‘한국의 경제기적은 끝났는가’란 제하의 기획 기사를 보도했다.


이날 FT는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다양한 첨단 산업 분야 전문가와 경제학자들과 인터뷰를 소개하며 국가 주도 자본주의로 급격한 경제성장에 성공한 ‘한강의 기적’이 제조 대기업에 의존한 낡은 경제성장 모델, 높은 가계부채와 자살률, 저출산과 고령화, 중국의 맹추격과 원천 기술 부재 등을 이유로 수명이 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FT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들이 AI 시대를 맞아 용인에 300조원 규모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를 진행 중인 점을 소개하면서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는 한국의 주력 수출 산업이 중국과 미국의 경쟁사에 의해 주도권을 빼앗길 것이란 우려 가운데 한국 정부가 지원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앞서 지난달 21일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용인 SK하이닉스를 찾아 “올해 기업들이 반도체 120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고대역폭 메모리(HBM) 등 첨단 반도체의 수출 확대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FT는 “반도체 전문가 대부분은 한국의 반도체 제조사들이 첨단 메모리 칩 분야에서 기술 우위를 유지하고 AI 반도체 수요 급증에 대비하기 위한 용인 투자 필요성에는 동의한다”면서도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한국 정부의 제조 대기업들의 성장 동력을 강화하는 정책이 기존 경제 성장 모델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거나 무능함을 드러낸다고 우려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과거의 성공 공식에 얽매여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갈수록 추락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FT는 한국은행을 인용하며 1970~2022년까지 평균 6.4%씩 성장한 한국 경제는 2020년대 들어 연평균 2.1%로 성장 속도가 둔화되고, 2030년대 들어서는 0.6%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FT는 한국의 낮은 산업용 전기료에 대해 “한국 제조업에 막대한 산업 보조금을 제공하는 국영 전력회사 한국전력은 1500억달러에 달하는 부채를 쌓았고, 저렴했던 전기료와 인건비란 낡은 성장 모델의 기둥이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37개 회원국 중에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그리스, 칠레, 멕시코, 콜롬비아 다음으로 낮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FT 인터뷰에서 “외부에선 한국을 역동적이라 생각하지만, 모방을 통해 선진국을 따라잡는 경제 구조는 1970년대 이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며 한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등의 기술 상용화에는 강점이 있지만 신산업 육성을 위한 ‘원천 기술’ 개발에는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그간 한국 경제 성장을 주도해온 ‘재벌’이 이끄는 대기업 집단의 리더십도 성장 지향에서 현상 유지로 기조가 바뀌었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거론됐다.


박 교수는 “현재 오너 3세가 다수 경영진으로 참여한 대기업들이 ‘성장 지향적 사고’에서 ‘현재 지향적 사고’로 바뀌었다”고 지적하며 한국의 기술력은 미국 빅테크와 중국의 부상이란 2가지 충격에 더해 삼성, LG가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던 2011년을 전후로 이미 정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과거 한국이 일본이 주도하던 글로벌 디스플레이 산업 패권을 장악한 것처럼, 이젠 중국 기업들이 첨단 반도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 경쟁사를 따라잡았고, 과거 고객 또는 하청업체던 중국 기업들이 이젠 한국 기업의 경쟁자가 됐다.


저출산·고령화에 인구구조가 붕괴하고 있는 점도 ‘한강의 기적’이 끝났다는 의견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오는 2050년경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022년 대비 28%나 낮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생산가능인구가 같은 기간 약 35%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저출산 고령화와 높은 자살률 등의 사회적 문제의 원인 중 일부는 대기업 중심의 경제 성장이 가져온 부작용이다.

박 교수는 FT에 대기업이 많은 중소기업들과 독점적 계약을 빌미로 납품 가격을 압박한 결과, 근로자의 80%가 고용된 중소기업은 직원과 설비에 투자할 자금이 부족해 생산성 악화와 혁신 둔화란 측면에서 희생당해 왔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박 교수는 “과거에는 재벌이 육성·지원을 받아 해외 경쟁사들과 경쟁에서 이기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게 이 같은 대기업 지원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며 “이제 대기업은 국내 혁신을 방해하고 파괴적 혁신에 매우 취약해졌다”고 덧붙였다.


지난 2021년 기준 한국 GDP의 절반 가까이가 전체 근로자의 6%를 고용한 대기업에 의해 이뤄지면서 한국의 대기업·중소기업으로 양극화된 산업구조는 사회적·지역적 불평등을 낳고 청년층의 무한경쟁을 불러 일으키며 저출산과 높은 자살률에 일조하고 있다는 게 박 교수의 지론이다.


지난해 미국 싱크탱크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PIIE) 상주 선임위원으로 영입된 여한구 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FT에 “한국 산업은 기존 모델에서 벗어나려고 해쓰고 있지만,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선 아직도 해결된 게 없다”고 전했다.


이 같은 낡은 성장 모델은 올해 4월 총선에서 ‘여소야대’ 정국이 펼쳐지면서 더욱 해결이 어려워지게 됐다는 지적도 나왔다.

FT는 “올 4월 총선에서 좌파 정당이 승리하면서 좌파가 장악한 국회와 인기 없는 우파의 행정부로 양분돼 2027년 차기 대선까지 3년 이상 교착상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다만, 일각에선 AI 시대가 오면서 한국이 제조업과 대기업 중심의 사고방식을 넘어 새로운 성장 분야를 개척할 수 있는 기회로 본다는 점도 FT는 소개했다.


AI반도체 설계 스타트업 레벨리온의 박성현 대표는 FT를 통해 한국이 이미 AI에 필요한 4가지 핵심 요소 중 논리 시스템 반도체, 메모리 반도체, 클라우드 서비스에 대한 역량을 갖추고 있고 정교한 AI 알고리즘 역량 확대만 남았다고 주장한다.


박 대표는 “한국의 AI 하드웨어 강점은 중요하지만, 또 다른 발전을 위해선 AI 밸류체인을 디자인과 소프트웨어 영역으로 확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끝으로 FT는 한국은행이 주장한 구조개혁이 계속 지연되고 있다는 점을 거듭 우려했다.

한국은행은 앞서 이창용 총재 등을 통해 반복적으로 노동시장, 연금 등에 대한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FT는 “사교육비 지출은 늘고, 출산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연금, 주택, 의료 개혁은 정체된 반면 대기업에 대한 국가경제 의존도를 줄이고, 기업가치를 제고하고, 서울을 아시아 금융 허브로 만들겠다는 오랜 캠페인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최재경 전 민정수석은 FT에 “한국의 DNA에는 역동성이 내재돼 있다.

우리는 경제적 역동성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정책을 재설계해야 한다”며 “아직 한강의 기적은 끝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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