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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현지시간) 정상회담을 마친 미일 주요 인사가 백악관 집무실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와야 다케시 일본 외무대신, 이시바 총리, 트럼프 대통령, J.D. 밴스 부통령. [일본 총리실] |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가장 강한 동맹국으로 정리된다.
정확히 80년 전인 1945년에 두 나라가 목숨을 걸고 4년간 싸웠던 태평양 전쟁이 종결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얘기가 다소 어이없을지도 모른다.
전쟁 직후 일본의 안보는 미국을 중심으로 짜였다.
당시 미군정 하에서 총리를 지냈던 요시다 시게루는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일본은 경제 재생에 주력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요시다 독트린’으로 불린 이것은 지금도 일본 외교 정책의 근간이 되고 있다.
일본 외무성이 정리한 ‘외교기본방침’ 제1장에도 미국의 핵우산을 활용해 일본의 안보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미국과 일본의 정상회담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
미국 정부로부터 일본의 안전을 확약받아 국민을 지키는 생존의 문제다.
전후 80년간 일본 외교의 핵심은 미국과의 동맹 강화로 정리된다.
미국 대통령이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큰 문제가 없었지만, 도널드 트럼프처럼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일본은 이미 트럼프 1기 때 이를 경험했다.
일본은 2016년 대선이 진행 중일 때 은근히 힐러리 클린턴 편에 섰다가 트럼프 당선 뒤 호된 앙갚음을 당할 뻔했다.
“일본이 미국을 이용해 돈을 벌고 있다”는 으름장이 트럼프로부터 흘러나왔다.
다급해진 일본은 모든 네트워크를 동원해 당선인 신분이던 트럼프를 미국 뉴욕에서 만났고, 이듬해 2월 미국 백악관서 열린 첫 정상회담에서는 투자와 고용이라는 큰 선물을 안겼다.
경제적으로 보면 일본에 큰 손해였지만 당시 회담을 이끌었던 고(故)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웃는 얼굴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예민한 문제였던 환율이나 무역 불균형, 방위비 분담 등의 얘기가 트럼프 입에서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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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이시바 총리에게 친밀하게 인사하는 트럼프 대통령. 가운데는 고 아베 신조 총리 때에도 미일간 통역을 담당한 다카오 스나오 외무성 일미지위협정실장. [일본 총리실] |
트럼프 재선 뒤 첫 미일 정상회담을 맡게 된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트럼프의 발언은 더욱 위협적으로 바뀌었고, 여기에 속도를 내려고 했다.
동맹이나 우방은 고려사항도 아니었다.
오락가락하는 트럼프와 자기말 하기 좋아하는 이시바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소위 ‘케미’가 다른 인물로 보였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아베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시바는 이번 미일 정상회담에서 3가지의 꾀주머니로 트럼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나는 무장을 해제하고 트럼프의 품에 훌쩍 뛰어든 것이다.
그는 트럼프의 코드에 맞춰 끝없는 칭찬을 이어갔다.
이는 “아부만 해서 한심하다”고 본인이 직접 비판했던 정적인 아베 전 총리의 기존 방식을 따른 것이다.
지난해 7월 유세 도중 총격으로 귀를 다쳤을 때 찍힌 사진을 언급하면서 트럼프에게 “신에게서 선택받았다”고 한 발언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드문 개신교 신자인 이시바 총리로서는 최대한의 립서비스를 한 것이다.
트럼프가 강조해 온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칭찬하고, 트럼프 대통령 인상에 대해 “성실하고 강한 사명감으로 가진 분이라고 느꼈다”고 추켜세운 것은 평소의 이시바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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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 총리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는 트럼프 대통령(오른쪽) [일본 총리실] |
두 번째는 철저한 준비다.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가 당선된 지난해 11월부터 별도의 팀을 꾸려 정상회담 준비에 나섰다.
예상할 수 있는 모든 질문에 트럼프가 가장 좋아할 만한 답변을 준비했다.
트럼프를 미리 만났던 고 아베 총리의 부인 아키에 여사나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트럼프 시절 주미 일본대사 등의 전문가들을 두루 만나 그의 취향에 대한 작은 부분까지도 조언을 들었다.
아베 전 총리 시절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작은 총리’로 불렸던 외무성 간부에게 통역도 다시 맡겼다.
간부급이 정상 간 통역을 맡는 것은 일본에서는 드문 일이다.
아베 목소리보다 통역의 목소리가 트럼프에게 더 친숙하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마지막은 일본만의 ‘오모테나시(일본 특유의 손님을 환대하는 대접 문화)’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이시바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상상했던 이상의 숫자로 투자 금액을 밝히고, 이를 통해 그를 즐겁게 했다.
“더 했으면 좋겠다”는 그의 요구에는 확답은 피했지만 밝은 웃음으로 여지를 뒀다.
선물로 준 금장 사무라이 투구는 이를 모두 상징한 것이다.
선물의 준비는 트럼프 당선 직후부터 시작됐다.
반짝이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트럼프의 취향을 모두 반영한 것이다.
드라마 ‘쇼군’과 MLB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의 홈런 세레모니로 사무라이 투구는 미국인들에게 매우 친숙하다.
일본 외부성 간부가 “트럼프보다 손자들이 더 좋아할 것”이라고 언급한 것은 괜한 자부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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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 총리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선물한 금빛 사무라이 투구 [닌교노하나후사] |
이번 미일 정상회담에 대해 한국 쪽은 ‘아부외교’로 폄하하는 분위기가 많아 보인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안보와 경제를 맞바꾼 것을 단순히 아부로만 돌릴 수 있을까.
과거 프로이센을 설계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외교란 싸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외교천재의 이야기를 수장이 사라진 우리 외교 라인은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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