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2천여점 예술품 수집
한일 양국에 모두 기증해
한일 청년 작가 양성 위해
도록 제작, 전시회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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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웅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이 서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그의 자서전 격의 책인 ‘인연자본’ [도쿄 이승훈 특파원] |
지난 5일 도쿄에서 전철로 1시간 거리인 사이타마현 가와구치시를 찾았다.
1만2000여점의 미술을 수집해 이를 한일 양국에 꾸준히 기부해 온 것으로 유명한 하정웅 컬렉터(85)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집 안에 들어서자 여든이 넘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그가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이라고 찍힌 명함을 건넸다.
‘아직도 관장’이냐는 말을 건네니 “평생 직함이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광주시립미술관은 그가 처음 미술품을 기증한 곳이자, 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컬렉터로서 하정웅 관장의 시작은 1960년대 후반이다.
그가 구입한 첫 작품이 재일교포 화가 전화황의 ‘미륵보살’이다.
여기에 매료된 그는 이후 ‘백제관음’ ‘아수라상’ 등 총 92점의 전화황 작가 그림을 사들이고, 한국에 그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전화황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마음의 평온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은 못하게 됐지만 컬렉터는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이때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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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황의 1976년 작 ‘미륵보살’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
1939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아키타현에서 자란 그는 재일교포 2세다.
부모는 가난을 피해 전남 영암에서 이 곳까지 흘러왔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공부를 잘했던 그이지만 미술을 하려는 것은 부모가 끝까지 반대했다.
좋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조센진(조선인)’인 하정웅 관장에게 취업은 쉽지 않았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우연히 1964년 전자제품 가게를 운영하게 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1964년은 도쿄 올림픽이 있었던 해입니다.
컬러 TV를 사려는 수요가 엄청났어요. 당시 TV는 지금보다 훨씬 고가였는데 10개월 할부, 40개월 할부 등의 아이디어를 내 제품을 많이 팔았어요.”
이때 번 돈의 상당 부분은 도쿄와 인근 부동산 구입으로 이어졌다.
당시 건강이 안 좋았던 그가 가족을 위해 준비한 생계 대책이었는데,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일본 경제 덕에 그에게 큰 자산으로 돌아왔다.
50년 넘게 컬렉터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도 이 덕분이다.
“재일교포 작가들이 그림이 안 팔려 궁핍한 생활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들의 그림부터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서 작품활동을 하던 이우환 작가의 그림을 많이 갖게 된 것도 이런 이유예요.”
파블로 피카소나 살바도르 달리, 마르크 샤갈 등 서양 미술사 거장의 그림도 그의 컬렉션에 들어있지만 많은 부분은 재일교포 작가다.
특히 전화황처럼 북한 출신 재일교포 작가의 작품이 상당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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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가장 깊은 호수로 유명한 아키타현의 다자와코 [도호쿠관광청] |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아키타현에는 ‘다자와코’라는 이름의 호수가 있다.
1940년 이곳에 오보나이 수력발전소를 지을 때 부모 모두가 힘든 환경에서 일했다.
“수력발전소 공사현장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 온 조선인들도 많았습니다.
위험한 공사 과정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조선인들이 허다했지요. 다자와코 곳곳에 무연고 묘비가 있어요.”
일본 정부가 호수를 바라보는 곳에 히메관음상을 세운 것도 이러한 위령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넘어 그는 1980년대에 이곳에 ‘기도의 미술관’을 지으려고 했다.
그의 컬렉션을 모아 강제징용과 간토대지진 등으로 희생된 재일 한국인들을 위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재일교포이자 세계적 건축가인 이타미 준이 미술관 설계도 해 줬습니다.
이곳 지방정부도 적극적이어서 순조롭게 계획이 진행됐는데 1980년대 후반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 등이 크게 쟁점이 되면서 모든 것이 백지화되어버렸어요.”
이러던 와중에 공공미술관을 처음으로 지은 광주광역시에서 1993년 연락이 왔다.
건물은 있지만 전시물이 없는데 기증을 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컬렉터로서의 그의 안목과 수집품에 대한 존경을 담은 요청이었다.
“광주도 1980년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안고 있는 곳이에요. 다자와코 못지않게 한이 서려 있는 곳인 데다 ‘도와 달라, 키워 달라, 사랑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명분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22점의 작품을 처음으로 기증하게 됐습니다.
”
이를 시작으로 하정웅 관장의 기부는 이어진다.
광주시립미술관에 2600여점, 포항시립미술관에 2200여점 등 한국에만 13곳의 미술관에 작품이 건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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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웅 컬렉터 부모의 고향인 전남 영암에 세워진 전남영암하정웅미술관. 설계를 하정웅 컬렉터가 맡았다. [한국관광공사] |
부모 고향인 전남 영암에 세워진 전남영암하정웅미술관에는 가장 많은 4600여점이 기증됐다.
일본에도 그가 살고 있는 사이타마현립근대미술관을 비롯해 10곳의 미술관에 그의 컬렉션이 전달됐다.
“처음 작품을 기증했을 때 ‘재일교포 쓰레기 작품을 보내왔다’고 헐뜯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시 포함된 작품이 지금은 한 점에 수십억 원에 달하는 이우환 작가의 작품이었어요. 미의 가치를 돈으로만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름다움에 이해관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컬렉터이자 기부자로서의 그의 활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지금은 한일의 젊은 작가들을 외부에 알리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유망한 작가의 작품을 사서 도록을 만든 뒤, 이것을 원하는 미술관에 기증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하정웅청년작가초대전’도 23번을 이어왔다.
작품을 기증할 때 그가 유일하게 요청한 것이다.
2001년부터 매년 ‘빛’을 주제로 열렸으며 지금까지 119명의 청년작가가 배출됐다.
1만2000여점이나 수집한 컬렉터로서 가장 기억나는 작품을 물었다.
그는 “전부 좋아서 수집한 것이고 마음으로 애착이 크다”며 “수집한 작품 전체가 내가 그렸던 한 편의 커다란 그림같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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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웅 컬렉터(왼쪽)와 그의 부인 윤창자 씨.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
평생을 들여 미술품을 수집하고 이를 기부한 것에 대한 어려움을 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부분 사람이 기부가 어렵거나 돈이 많은 사람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메세나 활동은 돈이 많은 기업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돈을 못 내면 힘으로 봉사하고 마음으로 후원하는 게 메세나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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