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의 유럽 ◆

유럽연합(EU) 27개국 정상이 17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정상회의를 열고 경쟁력 강화를 위한 숙의에 착수했다.

18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정상회의에선 경제 혁신과 통합 위기에 직면한 EU의 현재 분위기를 반영해 경쟁력 강화, 난민 문제 등을 주요 의제로 다룬다.

첫날부터 회의장에는 혁신 동력 실종과 분열 등 내부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정상들은 지난달 EU 집행위원회의 의뢰로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전 이탈리아 총리)가 제시한 '유럽 경쟁력 강화' 보고서의 주요 제안들을 집중 논의했다.

드라기 전 총재는 규제 문턱은 높고 민간 혁신 투자는 저조한 유럽의 현실이 경제를 '실존적 위기' 상태로 몰고 있다며 유럽 국내총생산(GDP)의 4%가 넘는 연간 7500억유로 이상을 민간 투자에 써야 한다고 촉구했다.


27개 회원국의 GDP 성장률은 코로나19발 대규모 유동성 공급이 시작된 2021년 6.2%를 찍은 뒤 2022년 3.3%, 2023년 0.4% 등 빠르게 식어 가고 있다.

EU 집행위에 따르면 올해 성장률 전망치는 1%다.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전망한 올해 선진국 성장률 평균치인 1.7%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주목되는 것은 경기 침체 여파 속 EU 회원국 간 분열 양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각국 경제가 위기에 봉착하자 국수주의가 두드러지며 산업 규제·관세 등 각종 정책 결정에 있어서 하나 된 목소리가 실종된 상황이다.


2035년까지 유럽에서 판매되는 차량 100%를 전기차로 전환하려는 EU 계획이 대표적이다.

정상회의를 하루 앞둔 16일 파이낸셜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보프케 훅스트라 EU 기후담당 집행위원은 다음달 예정된 유럽의회 청문회 답변 자료에서 2021년 도입된 전기차 전환 법률에 대해 "철회할 수 없으며 철회해서도 안 된다"는 강경한 입장을 담았다.

반면 유럽 완성차 업체와 독일, 이탈리아 등 일부 회원국은 중국산 전기차로 인해 생존 위기에 몰린 역내 기업들의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며 전환 계획 연기와 유연한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 최대 단일시장으로 회원국 간 시너지를 자랑했던 EU가 산업 위기 속 무리한 규제에 불만을 터뜨리며 분열하는 양상이다.


EU가 인공지능(AI) 등 기술 관련 규제를 의욕적으로 도입하면서 미국 등 빅테크 업체의 진출은 물론 역내 혁신 산업 양성에도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달 유럽에서 활동하는 기업가와 연구진은 이례적으로 EU의 AI 규제를 비판하는 공개 서한을 냈다.

유럽의회가 지난 5월 통과시킨 AI법을 겨냥한 것이다.

AI법에는 챗GPT와 같은 AI 서비스가 개인정보 보호, 차별적 표현 금지 등의 규제를 위반하면 전 세계 매출의 최대 7%에 해당하는 과징금을 내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스포티파이, 에릭슨, SAP 등 유럽 대표 정보기술(IT)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49명의 기업 임원, 교수 등이 서한에 서명했다.

이들은 "유럽이 일관성 없는 규제로 AI 부문에서 더욱 뒤처질 위험에 처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근 EU 집행위가 추진한 대중국 전기차 고관세 부과 투표는 역설적으로 회원국 간 각자도생병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중국 시장에 자국 브랜드 차량을 팔아야 하는 독일과 스페인 등 5개국이 반대표를 행사했고, 중국발 보복 규제에 부담을 느낀 12개 회원국도 무더기 기권표를 던졌다.

블룸버그는 최근 EU 회원국들이 정책 현안에서 의견 조율에 어려움을 겪는 양상을 지목하며 "정치적 마비, 외부 위협과 저성장의 조합이 글로벌 강국이 되려는 EU의 야망을 종식시킬 판"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난민 문제를 놓고도 회원국 간 신경전이 거세다.

지난 10여 년간 유럽으로 난민이 몰려들면서 국경 검문과 난민 정책을 둘러싼 분열이 두드러지고 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지난 15일 이민자들의 망명 신청을 일시 중단하는 계획을 포함한 난민 정책 패키지를 공개했다.

이탈리아는 지난 11일 유럽 최초로 역외 '이주민 송환 허브'를 알바니아에 개소했다.

EU는 최근 입장을 선회해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역외 송환 허브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문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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