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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법 이야기] "아니 만남" 인연의 아름다움
기사입력 2020-11-28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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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1973)의 마무리 구절이다.

필자는 사춘기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이 글을 읽었다.

사람 사이의 만남은 얄궂은 운명의 벽 앞에서 절연되어 기억 속에 그리움의 응어리 화석으로 남기도 한다.

때론 아름다운 해우, 그 순수함에 티끌 하나도 더하고 싶지 않아 인연의 시간을 단절의 의지로 정지시키곤 마음 앓이를 하기도 한다.

이 글을 접한 열일곱 소년은 앞으로 마주할 인생사 인연들을 왠지 불길한 두려움 속에서 기다려 보기로 했다.


특히 세 번째 아사코와의 만남을 놓고 회고감을 피력한 마지막 구절은 그 비장미로 인해 마음을 찢어 놓았다.

반세기를 건너선 지금까지 인생 수필의 한 대목으로 남았다.

아니 만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아니 만남"이 있었기에 더욱더 애잔한 기억으로 남은 그들 인연은 유장한 세월의 여운 속에서 감칠맛이 점점 깊어질 터이다.


이 수필에서 선생은 열일곱에서부터 마흔넷까지 27년에 걸친 아사코와의 세 차례 짧은 만남을 인연으로 풀어놓고 있다.

그런데 이 인연을 수필로 발표한 때는 선생 나이가 아사코와의 마지막 만남으로부터도 근 이십 년을 더 격한 육순을 넘긴 시점이었다.


선생이 이 인연을 이처럼 아름다운 글로 담담하게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세월의 흐름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나머지 이십여 년의 세월로 조용히 발효 과정을 거친 "아니 만남"의 인연. 역설의 절제 속에서 숨겨진 감수성은 이제 자유롭게 풀려나와 삶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마법을 부린다.


이 글과 첫 인연을 맺은 때로부터 사십 년 남짓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에 명멸을 거듭하며 맺어온 수많은 인연. 이들을 이 수필에 대입하며 견주어 본다.

사십 년 전 불길함에서 다소간 해방된 느낌이지만 인연은 여전히 고통의 바다, 인생사 아픔으로 남으리란 예감에는 변함이 없다.

그 아픔의 근원은 '언젠가는 이승과 저승으로 우리 영원히 헤어질 것'이라는 느낌 속에 다 담겨 있겠다.

그 이별의 안타까움은 삶의 숙명 중 하나일 것으로, 유달리 돌아볼 것까지도 없을 듯하다.


개중 특이한 인연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아니 만남"이라는 인연. 기억의 향기와 빛깔은 아직도 생생하건만, 과거로 다시 돌아가 현실로 이어줄 거리가 너무 멀다.

그러다 보니 좀체 몸을 움직일 처지가 못되는 듯하다.

백합은 피었다 지는 것이 당연지사일 터. 새로 산 잠바도 세월의 흔적, 초췌한 구겨짐을 더는 지우지 못하게 됐다.


오늘 현장이 이처럼 시간의 논리 앞에서 명백하건만, 지난 시절에 대한 소중한 기억은 간섭받지 않고 그냥 보듬어 남겨두고 싶기도 하다.

그것이 내 삶의 한 여적이기에 더욱 그러한가 보다.

특히나 어려운 시절을 함께한 이들과의 기억, 인연은 "다시 만남" 없이도 그래서 영원히 지속할 듯싶다.


필자는 직업 때문에 사람들의 분쟁 현장에 들어가 싸움을 말리기도, 붙이기도 하면서 지금껏 살아왔다.

실로 그들 싸움의 근본에는 어김없이 인연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좋은 인연도 찧고 까불다 보면 악연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점점 나빠져만 가는 사이는 끝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고 애당초 만나지 말았어야 할 것을 후회하는 일로 귀결된다.


간혹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어떤 인연은 만남의 지속 과정에서 악화 일로를 걷다가 악연으로 매듭되고 마는데, 왜 어떤 인연은 "아니 만남" 속에서도 기억에서 단 한 점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승화되는가.
그 질문에 답이 찾아질지 잘 모르겠지만, 이번 주말 섬 산행을 하면서 초겨울 바람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만나면 물어볼 작정이다.

바다 경치가 빛나는 햇살로 아름다울 것이다.


[김상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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