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때를 만난 아이디어는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시의적절한 아이디어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는 의미다.
기본소득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던 이 말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에너지 정책에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던진다.
특히 산업과 에너지 소비의 공간적 재배치를 논의하는 지금 이 말은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전력 다소비 국가다.
2023년 기준 1인당 전력 소비량은 약 1만1000킬로와트시(kWh)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을 훨씬 웃돈다.
특히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에너지 집약 산업은 저렴한 전기를 찾아서 해외로 나가려 하거나, 국내에서 에너지 비용을 낮게 제시하는 지역으로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내에서는 지역 간 전력 인프라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
동남부 지역은 고리, 월성 등 대형 원전들이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한다.
전라남도 영광을 비롯한 호남권은 한빛원전 6기가 운영되고 있는 데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 전력 공급량은 많지만 상대적으로 전력 소비는 적다.
반면 수도권은 국가 전체 전력소비의 약 40%를 차지하면서도 발전시설은 부족해 외부 전력 의존도가 높다.
이에 정부는 '에너지 고속도로' 계획을 통해 전남, 전북 등지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를 수도권으로 보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민원과 인허가 문제로 얼마나 속도를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송전선로 구축만 10년 이상 걸릴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사이 재생에너지 발전이 활발한 날, 호남 지역의 잉여 전력은 버려지거나 원전의 출력을 제한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여기서 위고의 말처럼 '때를 만난' 하나의 아이디어가 있다.
'에너지 고속도로'가 완공될 때까지의 과도기에 대응하기 위한 방법으로, 호남 지역에 하이퍼스케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반도체 공장, 청정수소 생산시설 등의 인프라를 배치하고 한빛 원전이 생산하는 전력 중 일부를 이들 시설에 '직접' 공급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는 송전 용량을 활용해 호남의 재생에너지 전력을 수도권으로 송전하면 된다.
실제로 AI 데이터센터는 1개소당 100~300메가와트(㎿) 이상 전력을 상시 요구하며, 대규모의 안정적인 전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원전이 이러한 조건에 가장 적합하다.
따라서 호남에 이 같은 인프라를 배치하면 수도권 송전 부담을 줄이면서 국토 균형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현재 고리·월성 원전에서 생산하는 전력은 포항, 광양, 울산의 제철 및 석유화학 단지에 직접 공급하는 구조도 필요하다.
물론,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현하려면 현행 송배전 규제, 전력요금 체계, 사업자 간 계약 제약 등 제도적 장벽을 넘어야 한다.
법, 제도의 정비 없이는 새로운 에너지 질서도, 산업 재편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
넘치는 재생에너지를 허비하고, 중화학과 첨단산업을 해외로 다 떠나보낼 것인가, 아니면 제도를 고치고 에너지와 산업을 함께 살릴 것인가. "때를 만난 아이디어는 막을 수 없다.
" 지금이 바로 그때다.
[황주호 한국원자력산업협회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