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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재앙 닥치자…은신처 `벙커` 美 사로잡았다
기사입력 2020-12-0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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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할 때 일이다.

아이가 다니고 있는 초등학교에서 집으로 안내문이 왔다.

응급 상황이 닥쳤을 때 필요한 것들을 담은'이머전시 키트'를 개인적으로 준비해 아이 편에 학교로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안내문에는 A4용지보다 조금 작은 플라스틱 투명 상자안에 들어가야할 물품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생수2통, 에너지바 3개(뜨거운 날씨에 녹을 수 있는 초콜릿이 함유된 제품은 안됨), 면장갑(비닐장갑 안됨), 건전지가 반드시 분리된 손전등 등 리스트가 워낙 상세하게 돼있어 놀랐다.

캘리포니아에선 워낙 지진이나 화재, 심지어 교내 총기사고 등 재난 상황이 속출하니 어쩔 수 없겠거니 했다.


정작 준비에 많은 시간이 걸린 건 마지막 준비물, 편지였다.

만일의 상황에 당신의 아이가 부모의 편지를 마지막으로 읽게 될 수 있으니 내용은 각자 알아서 잘 써달라는 친절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릿속으로 아이에게 생길 수 있는 온갖 불길한 상상을 하면서 컴퓨터의 껌뻑이는 커서 앞에 앉아있자니 일순간에 지옥에 떨어진 듯 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그날밤 부엌 테이블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글자씩 써내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일랜드 더블린의 가장 큰 대학인 유니버시티칼리지더블린(UCD)에서 사회지리학을 가르치는 브래들리 개럿 교수는 이렇게 최악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Bunker>를 썼다.

부제는 '마지막을 위한 건축물(Building for the End Times)'이다.


흔히 '벙커'라고 하면 전쟁때 자연적 또는 인공적 장애물에 의하여 적의 관측과 사격으로부터 보호되도록 만든 엄폐식 지하 공간을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벙커는 2000년전에도 있었다.

터키 아나톨리아에는 카파도키아 평원 아래 2만명의 사람들이 살 수 있었던 지하도시 200개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당시 왜 이런 지하도시가 필요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인류가 노출된 지상만을 삶의 터전으로 삼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개럿 교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2020년식 '벙커'를 탐구한다.

개럿 교수가 보기엔 미국 정부가 각자 건물 내에 짓고 있는 완벽한 요새이나 미 중부의 민병대들이 타고다니는 무장차, 방탄시설이 완비된 학교건물도 모두 벙커다.

이 사회지리학자의 눈에는 인간이 어떤 존재론적 두려움 앞에서 어디론가 숨어들어가기 시작한 것으로 비춘다.


실제 미국에선 벙커 비즈니스가 성황이다.

냉전시대 지어진 지하벙커들이 민간 부동산 개발업자들에 의해 재개발돼 인기 매물로 팔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극단적인 예, 부동산 디벨로퍼 래리 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디벨로퍼는 수년간 미 국방부로부터 수주를 받아 각종 군관련 건축물들을 짓는 일을 해왔다.

그러다 미 중부 캔사스의 거대한 미사일 저장창고를 눈여겨 본다.

래리는 냉전이후 버려진 이 벙커를 재개발해 팔기로 한다.

그는 이 땅을 미국 정부로부터 30만불에 매입해 1000만달러를 들여 재개발을 시작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하 15층짜리 고층빌딩에 총 15개 콘도를 지어 분양했는데, 안에 들어가면 없는 게 없다.

사격연습장, 영화관, 폭포가 있는 수영장에 도서관, 교육장, 편의점까지 있다.

심지어 지상과 똑같은 느낌을 줘 답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창문은 고화질 4K스크린으로 만들어 야외 풍경을 틀어준다.

가격은 한층 절반이 150만불, 전체층은 300만불에 달하는 데도 인기가 대단했다.


이런 럭셔리 벙커는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미국에선 이미'벙커'란 단어가 비즈니스를 넘어,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게 작가의 얘기다.

과거엔'프레퍼(Prepper)'가 인류멸망을 믿는 종말론자나 사이비 광신도들을 뜻하는 단어였지만 요즘 미국에선 370만명이 스스로를 '프레퍼'라고 주장(내셔널지오그래픽 조사)했다고 한다.

3억이 넘는 미국 인구의 1%에 달하는 사람이 인류멸망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조사다.

심지어 미국인 1200만명은 멸망까진 아니지만 만일의 재앙에 대비해 집에 비축 식량 등을 준비해놨다고 답변했다.

정부가 정부기관엔 벙커를 짓지만 민간인들에게까지 벙커를 공급해주는 것은 아니므로 스스로 벙커를 준비했다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벙커를 준비하는 마음은 두려움이다.

개럿 교수는 실존주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를 인용해 두려움을 뜻하는 영어단어가 두개가 있다고 설명한다.

'fear'와 'dread'가 그것이다.

우리말로는 둘다 '두려움'으로 해석되지만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fear'는 어떤 형태가 있는 물건 등에 대한 두려움이고, 'dread'는 몰라서 무서운 것, 즉 어떤 비정형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를테면, 홍수에 대한 두려움은 'fear'이지만 기후변화·팬데믹 등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은 'dread'다.

작가에 따르면 벙커는 이런 알 수 없는 두려움'dread'를 이겨내기 위해 생겨났다.


가령, 트럼프 대통령이 들어선 이후 미국에서는 전혀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종종 일어났다.

인종차별로 인한 각종 무법 사태, 약탈, 시위, 총기 사고 등에 이어 최근 미국을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까지. 이정도면 불안심리를 자극해 벙커를 지어파는 비즈니스도 일견 이해된다.

요즘같은 불확실한 시대에 은신처를 파는 이런 확실한 비즈니스가 어디 있겠나 싶다.

이 책의 결론은 그러나 염세적이고 허무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미래가 있으니까 벙커라도 준비하려는 게 아니겠냐는 쪽이다.


캘리포니아 초등학교의 '이머전시 키트'는 학년말이 되어 다시 아이편에 집으로 돌아왔다.

학기초 눈물을 짜내며 써 보냈던 '마지막 편지'도 다행스럽게 다시 그대로 돌아왔다.

플라스틱 응급 상자를 열자 모든 게 내가 처음에 보냈던 그대로다.

그동안 교실 한켠에서 먼지에 쌓여있느라 쾨쾨한 냄새를 조금 피울 뿐. 내년 새학기때 이 물품들을 또 사려면 귀찮으니까 잘 보관했다가 또 쓰기로 했다.

당연히 편지도 함께. 어쩐지 훈훈한 깨달음이다.


[한예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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