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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마 위해 저당잡힌 인왕제색도·금강전도
기사입력 2019-12-11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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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회화계의 불후의 대걸작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국보 216호)`. 겸재가 인왕산에 은거하던 1751년, 76세 때 탄생됐다.

삼성리움 소장.

[국보의 자취-19]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왕산의 실제 모습을 사실적으로 화폭에 실은 우리나라 회화계에서 불후의 대걸작이다.

국보 제217호 '금강전도(金剛全圖)'는 마치 항공 촬영을 하듯 하늘 위에서 금강산 1만2000봉우리를 장대하게 담아낸 우리나라 산수화의 백미 중 백미로 평가받는다.


두 작품의 작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안견과 함께 '조선 회화 2대가'로 꼽히는 겸재 정선(1676~1759)이다.

애초 서예가이자 미술품 수장가였던 손재형(1902~1981)이 김홍도 군선도병풍(국보 제139호), 김정희 세한도(국보 제180호) 등 다른 국보급 미술품과 함께 수집해서 갖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1958년 정치에 투신하면서 선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저당 잡혔다가 주인이 바뀌었다.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군선도병풍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에게 소유권이 넘어갔고, 세한도는 수집가 손세기 등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돼 있다.


조선왕조 518년간 무수히 뛰어난 화가가 배출됐다.

산수화 대가 중에서 조선초기를 대표하는 화가가 안견이라면,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는 단연 정선이다.

안견이 북종화(北宗畵·기술적 연습과 수련을 중시)를 수용해 높은 경지의 이상적 산수화를 구현했다면, 정선은 남종화(南宗畵·작가의 교양과 정신을 강조)를 받아들여 독보적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창조했다.

중국 화본을 바탕으로 했지만 관념산수의 답습이 아니라 조선의 실제 산천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것이다.


"공은(겸재 정선) 집안이 가난하여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지만 사람들에게 옳지 않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경학에 깊어 중용, 대학을 논함에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함이 마치 외어서 말하듯 하였다.

(중략) 공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 작은 쪽지의 그림이라도 얻으면 진귀한 보물을 얻은 듯이 귀하게 여겼다.

"(조영석 '관아재고')
정선과 깊게 교유했던 사대부 화가 조영석(1686~1761)의 평이다.

궁핍한 환경 속에서도 성실한 생활태도, 진지한 인품, 학문적 열정, 걸출한 화가로서 높은 명성 등을 엿보게 하는 글이다.

겸재는 조선후기 화단에서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았지만 김홍도와 신윤복 등 중인 신분의 여느 화원들과 달리 양반 출신이었으며 성리학 등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고 첨지중추부사(당상관) 등을 거쳐 말년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건강한 삶을 살아 84세라는 기록적인 수명도 누렸다.


겸재는 서울 북악산 남서쪽 자락의 순화방 유란동(경기고등학교 부근)에서 출생했다.

사대부 출신이었지만 집안은 한미했다.

5대조 정응규가 정3품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고조부 정연이 종2품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한 후 문반 6품 이상, 무반 4품 이상의 현관(顯官)을 배출하지 못했다.

외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가난한 데다 14세 때 아버지까지 여의게 되자 생계를 위해 화가의 길을 택했다.

그의 집은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김수항과 그의 아들 여섯('6창'으로 불렸던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 창립) 등 신흥 안동 김씨 가문 근처에 있었다.

겸재의 그림은 김씨 가문의 감식 안에 들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겸재는 안동 김씨 가문과 인연을 쌓았고 이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화단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김조순(1765∼1832)의 문집은 "정선이 선대부터 오랫동안 이웃에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나의 고조부 김창집에게 '작은 벼슬이라도 구해 달라'고 요청하므로 도화서에 들어가도록 권하였다"고 언급한다.


그가 인생에서 전성기를 맞는 것은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다.

두 차례에 걸친 금강산행은 화가로서의 시각과 화단에서 그의 명성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36세(1711년) 때 1차 여행은 '신묘년 풍악도첩(보물 제1875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3폭을, 1년 뒤인 37세 때 2차 여행은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30폭을 각각 내놓았다.

1차 여행은 후원자이자 스승인 안동 김씨 문중의 김창흡(1653~1722)이 제자들을 데리고 떠나는 금강산행에 동행한 것이었으며 2차는 동생, 후배 등과 함께한 편안한 기분의 여행이었다.


그래서인지 해악전신첩은 많은 사람의 찬사를 받았으며 정선이 진경산수 화가로 입지를 굳히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특히 이를 김창흡의 동생 김창업(1658~1721)이 청나라 연경으로 가져가 중국 화가들에게 품평을 받았는데 "공재(윤두서)를 능가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윤두서가 굴욕감을 느끼고 낙향을 했다고 전해진다.

'해악전신첩'은 현전하지 않는다.

삼성 리움미술관이 소장 중인 국보 제217호 금강전도는 포항 청하현감으로 재임하던 1734년(영조 10)에 탄생했다.

겸재의 유별난 금강산 사랑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1747년인 72세에 또다시 금강산을 그렸다.

'정묘년 해악전신첩(보물 제1949호·간송미술관 소장)'이 그것이다.


인왕제색도와 함께 정선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진경산수의 백미 `금강전도(국보 217호)`. 포항 청아현감에 재직하던 1734년, 59세 때 그렸다.

삼성리움 소장.


겸재는 영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영조는 세제 시절 겸재에게 그림을 배웠다.

왕이 되어서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항상 '겸재'라면서 귀하게 대했다.

영조는 정선보다 18년 연하였지만 83세까지 장수하면서 정선과 60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했다.

왕은 겸재가 화업(畵業)을 이루도록 산수가 빼어난 지역의 지방관으로 나갈 수 있게 극진히 배려했다.


65세부터 70세까지 경기도 양천현령을 지내면서 '경교명승첩(보물 제1950호·간송미술관 소장)'을 제작했다.

서울 근교와 한강변의 명승지를 25폭의 그림으로 형상화했다.

직접 발로 걷고 배를 타고 가면서 그린 그림들은 300년 전 한강과 서울 교외의 자취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가장 친한 벗인 이병연(1671~1751)이 시를 덧붙인 이 화첩을 무척 아꼈던 그는 '천금물전'(千金勿傳·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이라는 인장까지 남겼다.


겸재는 1727년 북악산 남서쪽 집을 아들에게 물려준뒤 인왕산 동쪽 기슭인 인왕곡으로 이사해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은일의 삶을 즐겼다.

그러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76세 되던 해인 1751년 인왕산의 웅장한 자태를 최고의 필치로 묘사한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백악산' '백운동' '필운대' '세검정' 등 진경산수화의 백미들을 쏟아냈다.


겸재 정선의 `독서여가도`. 툇마루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선비를 묘사하고 있는데 그림 속 선비가 겸재 자신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실학적 기풍이 빛을 발하던 시절에 정선의 혁신적인 그림은 지식인들을 열광케 했다.

정선은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행세하는 거의 모든 집안에서 그의 그림을 소장할 만큼 화가로서 위상이 높아졌다.

그의 그림은 한양의 좋은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조선 화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한 화가'였던 것이다.

겸재는 총 4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주로 산수화로 알려져 있지만 전해지는 작품과 기록 등을 통해 인물, 화조, 초충 등도 그렸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는 작품 속에 자신의 모습을 남기기도 했다.

'독서여가도' 속 툇마루에 나와 앉아 망중한에 젖어 있는 선비가 겸재 자신이다.

책 읽기를 일삼고 서화에 뛰어나며 자연과 풍류를 즐기던 조선시대 선비의 전형적인 인상이다.

인왕산에 있던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인곡유거도(仁谷幽居圖)'도 온화하고 격조 높은 선비의 모습을 담고 있으며 시와 그림을 교환해 감상한다는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역시 소나무 밑에서 절친 이병연이 마주 앉은 정선을 묘사하고 있다.


정선은 '겸재파'를 형성하면서 조선후기 화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제자였던 심사정과 강희언, 최북, 김홍도, 이인문 김석신, 이재관 등이 겸재파로 분류되며 18세기 대표적 문인화가였던 강세황, 이윤영, 정수영 등도 그의 화풍을 계승했다.


그의 작품 중 국보는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 국보 제217호 금강전도 2점이 있다.

보물은 보물 제873호 육상묘도(毓祥廟圖), 보물 제1796호 해악팔경·송유팔현도 화첩(海嶽八景·宋儒八賢圖 畵帖), 보물 제1875호 풍악도첩, 보물 제1949호 정묘년 해악전신첩, 보물 제1950호 경교명승첩, 보물 제1952호 청풍계도(淸風溪圖), 보물 제1953호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 등 총 7점이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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