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더M M-PRINT GFW CITYLIFE LUXMEN 매경이코노미 MBN골드 MBN 매일경제
로그인|회원가입 |시청자 게시판
종목검색
  • 종목검색
  • 통합검색

헤드라인

광고
프로그램 바로가기
프로그램 바로가기 닫기
가나다순 카테고리순
광고
> 뉴스 > 기사
기사목록|||글자크기 
솔직하게 이야기하라
기사입력 2019-11-22 17:06
  • 기사
  • 나도 한마디
공유하기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와 배우 윤정희 씨 부부 /사진=매경DB
[이성민의 톡팁스-29]
◆사실을 말하는 것이 제일 좋다
"윤정희가 알츠하이머 투병 중이다.

"
재프랑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한 일간지에서 밝힌 내용이다.

'40년 잉꼬부부 백건우 고백 "윤정희 알츠하이머 심각하다"'는 기사는 그날 그 일간지의 인터넷판 톱기사로 떴다.

문화기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히로인으로 활약하며, 문희·남정임과 함께 한국 영화 1세대 트로이카로 군림했던 영화배우 윤정희. 영화 약 320편에 출연했고, 2010년 개봉작인 이창동 감독의 '시'에서도 주연으로 활약했다.

따라서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영화팬들은 윤정희의 투병 소식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기사를 읽은 독자들은 굳이 배우 윤정희의 투병 소식을 보도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사실 윤정희는 프랑스에 살고 있어 한국 나들이가 잦지 않았다.

따라서 굳이 알리지 않으면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투병은 알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도 백건우는 아내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투병 사실을 공개했다.

공연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공연 내용을 소개하는 자리에서였다.

백건우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백건우의 심정은 복잡한 상황임에 틀림없었다.

백건우가 윤정희의 투병을 공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언제나 원앙 한 쌍처럼 붙어 다니던 부부였기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윤정희에 대해 누구나 궁금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먼저 밝힌 것이었다.


"윤정희에게 10년 전 시작된 알츠하이머 증상이 심각해졌고, 딸의 옆집으로 옮겨 간호를 받고 있다.

"
기사는 백건우의 말을 큰 따옴표 안에 적어서 따로 옮겼다.

살을 붙이지 않은 남편 백건우의 고백일 수도 있었고, 알츠하이머와 관련된 윤정희의 실제 근황이기도 했다.


◆물론 사실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알츠하이머 증상이 10년쯤 전에 시작됐다.

우린 결혼 후부터 단둘이서만 살고 모든 것을 해결해왔다.

사람들은 나보러 혼자 간호할 수 없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잘 아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너무 힘들어했다.

특히 연주 여행을 같이 다니면 환경이 계속 바뀌니까 걷잡지를 못했다.

여기가 뉴욕인지 파리인지 서울인지. 본인이 왜 거기 있는지."
'윤정희 배우의 투병이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는 질문에 대한 백건우의 답이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둔 남편의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단둘이' '혼자 간호' '연주 여행' 같은 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피아노밖에 칠 줄 모르는 남편이 맞은 아내의 발병에 대한 황망함이었다.

보통 생애와 다른 예술가로서 고뇌가 아니라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적 생활인의 고단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기자는 백건우에게 윤정희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냐고 물었다.

생활인 백건우에 이어서 생활인 윤정희의 실체를 밝히는 상황이었다.

은막의 여왕 윤정희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현재 만 75세인 치매 환자 여성의 병세 공개였다.


"연주복을 싸서 공연장으로 가는데 '우리가 왜 가고 있냐'고 묻는 식이다.

'30분 후 음악회가 시작한다' 하면 '알았다' 하고 도착하면 또 잊어버린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묻고,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고 하면 '앙코르는 뭘 칠거냐'고 물어본다.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한 100번은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
윤정희를 연모했던 영화 팬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를 순식간에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로 망가뜨린 질환 알츠하이머.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윤정희의 증상이 분노하고, 격동하는 방식이 아니라 영화 속에서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상황을 물어보던 것처럼 자신에 관해 묻고 있다는 사실.
"올 초에 한국에 들어와 머물 곳을 찾아봤다.

도저히 둘이서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너무 알려진 사람이라 머물 곳을 찾기 쉽지 않았다.

그때 고맙게도 (딸) 진희가 돌봐줄 수 있겠다 해서 옆집에 모든 것을 가져다 놓고 평안히 지낸다.

지금은 잘 있다.

"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라.
기자와 만나기 전 백건우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딸과 함께 인터뷰 장소를 찾았을 때 백건우는 '더 이상 세상에 우리가 알던 여배우 윤정희는 없다'고 다짐했는지 모른다.

영화 팬들에게 윤정희의 치매 사실을 공개하는 것은 오히려 윤정희의 사망 사실을 알리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백건우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건우는 정공법을 선택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편이 자신에게 더 유익하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인터뷰 이후 백건우는 자유로워졌을 수도 있다.


세계의 주목을 받는 피아니스트지만 당대 최고의 여배우의 남편이라는 책임감을 자임하고 43년을 지내온 백건우. 두 사람과 관련된 불협화음이 밖으로 공개되지 않은 것은 두 사람 모두의 노력이 컸을 테지만 남편 백건우의 뼈를 깎는 노력이 동반되었을 것이다.

연주자로서 여배우의 남편으로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접시에 약을 골라서 놓고, 먹을 걸 다 사와서 먹여주고 했다.

그 사람이 요리하는 법도 잊어서 재료를 막 섞어놓고 했으니까. 밥 먹고 치우고 나면 다시 밥 먹자고 하는 정도까지 됐다.

딸을 봐도 자신의 막내 동생과 분간을 못했다.

처음에는 나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아무리 영화를 봐도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질 않을 정도였다.

"
백건우는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사람은 아니다.

짧고 꾸밈이 없다.

그러나 섬세한 피아노 연주처럼 아내 윤정희의 인생에 대해 조심성 있는 배려를 가지고 있었다.


"올 초 스페인에 연주 여행을 같이 간 게 마지막이었다.

이제 혼자 다니려니 적응하기가 쉽진 않다.

"
아내 윤정희의 알츠하이머 투병을 알린 피아니스트 백건우. 힘들었겠지만 백건우는 사실 고백을 선택했다.

자신은 물론, 대중이 가장 편히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제일 좋다.

물론 사실을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하라."
[이성민 미래전략가·영문학/일문학 박사]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목록|||글자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