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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의 대화] 신라 진흥태왕의 순행
기사입력 2019-05-25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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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신라시대 금석문 30여 점이 발견된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제155호)에서 그제 또다시 신라 24대 진흥왕(534~576·재위 540~576)이 친히 다녀갔다는 명문 각자가 확인돼 모두를 놀라게 했다.


조사단이 찾아낸 명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560년(진흥왕 21) 6월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 2명이 교대로 보좌해 진흥왕이 오셨다.

왕의 행차를 도운 이가 50명이었다.

" 접안 구조물, 뱃사공 등으로 볼 때 진흥왕 일행은 배를 타고 왕피천을 따라 성류굴에 갔을 것이다.

진흥왕 방문 이후 이곳은 화랑의 수련터 등으로 애용됐다.


560년이면 진흥왕이 27세 되던 해다.

'태왕(太王)'으로 불렸던 진흥왕이 정복 전쟁을 활발히 펼치던 시기다.

진흥왕은 우리 역사상 영토를 돌아보는 순행(巡幸·또는 순수)을 가장 많이 한 왕으로 꼽힌다.

순행 기념 비석(진흥왕순수비)도 곳곳에 세웠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선 벌써부터 성류굴 부근에 새로운 순수비가 존재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흥왕의 이름은 삼맥종이다.

23대 법흥왕이 후사 없이 죽자 7세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법흥왕의 동생인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다.

나이가 어려 즉위 초 모후(지소태후)가 섭정했다.

진흥왕은 18세가 되던 551년(진흥왕 12) 이전의 연호를 버리고 새 연호 '개국(開國)'을 공표한다.

계속적인 황제국의 천명인 동시에 친정의 시작을 뜻한다.

진흥왕은 이후 2번 더 연호를 바꾼다.


그는 재위 기간 영토를 한강 유역과 함경도까지 크게 넓혔다.

550년(진흥왕 11) 백제 금현성과 고구려 도살성을 공격해 빼앗았다.

그의 친정을 가능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듬해 모후에게 권력을 물려받자 이번에는 고구려 10개 군을 차지한다.

553년(진흥왕 14) 백제 동북 변경을 빼앗아 새로운 주를 설치했다.

다급해진 백제 성왕은 딸을 보내 진흥왕과 혼인시켰다.

그러나 땅은 돌려받지 못했다.

554년(진흥왕 15) 성왕은 관산성(옥천)을 선제 공격했으나 패하고 왕 자신도 전사했다.

일본서기는 "진흥왕이 성왕의 목을 경주로 가져와 궁궐 계단 밑에 파묻었다"고 서술했다.

진흥왕은 이어 비사벌(경남 창녕), 비열홀(함경도 안변), 고구려 국원성(충북 충주), 대가야(경북 고령), 남천(경기도 이천), 달홀(강원도 고성)을 차례로 격파하고 영토에 편입했다.


그러면서 몸소 정복한 땅으로 행차한다.

새로운 백성에게 진흥왕 자신의 위대함을 알리는 한편 동요하는 민심을 수습해 국경을 안정화하기 위해서다.

변경 지역에는 왕의 업적과 순행 목적, 함께 수행한 신료들 이름·부명·관등명을 새긴 순수비를 설치한다.

555년 북한산순수비(국보 제3호), 561년 창녕척경비(국보 제33호), 568년 황초령순수비·마운령순수비(북한 소재) 등이 그것이다.

순수비에서 진흥왕은 태왕, '짐(朕)'으로 호칭된다.

삼국사기의 연호 사용 기록과 함께 신라가 황제국을 표방했다는 증거로 언급된다.


진흥왕은 혹한의 순행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북한산 순행 때에는 한겨울인 음력 10월에 출발해 한 달 만에 경주로 돌아왔다.

여러 일화도 남겼다.

551년(진흥왕 12)에는 낭성(충추)을 지나가며 그곳에 거주하는 우륵을 불러 가야금 연주를 듣기도 했다.


진흥왕은 문화 분야에서도 많은 치적을 남겼다.

신라 역사서인 '국사'를 편찬했고 황룡사, 흥륜사, 기원사, 실제사 등 수많은 사찰을 지었다.

삼국 통일의 기반이 되는 화랑도 역시 그의 치세에 탄생했다.


거침없이 질주했던 진흥왕은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날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위 36년 만에 43세라는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

이를 예견한 듯 말년에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으며 이름도 법운으로 고쳤다.

그의 사후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공격을 받아 다시 위기에 처한다.

신라는 정복 군주가 죽은 지 꼭 100년이 되는 676년에야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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